유교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완전히 자리 잡은 지가 꽤 오래되었으며, 가장 유교가 화려했던 시절은 조선왕조 때이다. 고려왕조시절부터 유교는 서서히 자리 잡고 있었지만, 조선만큼은 아니었다. 유교의 가장 기본은 조상을 섬기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만큼 유교의 교리를 섬기는 나라도 없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유교적 색채를 버린 지 오래되었다. 동양 삼국에 유일하게 우리만이 기존 색채에 다양한 색을 더해 확고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유교적 교리가 일상생활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다. 특히 제사 부분은 많은 한국의 결혼한 여성들에게 부담을 주고 심하면 가정의 파탄까지 일으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제사를 아예 없애자고 할 수도 없다. 孝와 관계되기에 섣불리 말을 뱉을 수 없는 것이 현실정이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기일이 되거나 생각날 때 국화 한 송이로 끝나지 않는다. 제사의 방법 등등 수많은 지침이 있어 그 자체도 하나의 학문이라 할 정도로 우리는 유교의 뿌리 깊은 곳에서 나 볼 수 있는 복잡한 교리를 완벽히 실생활에 적용하고 지냈다.
"유교의 儒는 '술사'를 뜻했다."
유교의 뿌리는 '孔子'가 아니다. 사실 더 오래되었다. 유교는 조상을 섬기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조상을 언제부터 섬겼는지 알면 유교의 시작을 알 수 있다. 그 뒤에 수많은 교리들이 나오는 것은 뿌리가 아니라 곁가지의 출현이었다.
조상을 섬기기 시작한 것은 殷(은) 나라 때이다. 그 당시에는 '강, 산, 흙' 등을 주로 섬겼는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어느 시점부터 같이 병행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시점을 은나라 25대 왕인 '조갑'이 왕권을 잡은 시점으로 보고 있다. 그 뒤로 주(周) 나라가 은나라를 무너트렸지만, 제사의 대한 의식은 계속 은나라의 방식을 이어갔다.
은나라에서 제사를 주관했던 관리들을 계속 등용하였고, 제사도 계속 잇게 했다. 주나라는 서주와 동주로 나뉘든데 동주 시절에 제후국들의 힘이 강해지면서 사실상 주는 해체 수준을 밟는다. 孔子는 서주시절에 나와 유교를 설파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은나라의 제사방식과 조상을 섬기는 방법을 따라한 것이다.
儒는 "사람 人과 비 雨, 턱 수염을 가진 사람 而"를 뜻하는 말로 '비를 부르는 사람'으로 주술사의 역할을 뜻하는 말이었다. 실제 서기 100여년 경에 지어진 설문해자(한자의 사전)에도 儒를 '술사'로 묘사한다. 우리가 아는 '선비'가 아니었다.
은나라 시절에 지배층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상신에 대한 제사는 주나라에 하늘을 섬기는 것의 토대를 만들어 주었고, 집단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촉매제와 같았다. 그 와중에 들어간 개념이 효(孝)다. 부모를 당연히 공경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국가의 수장을 부모처럼 여길 수는 없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 개념이 '효'이다.
가장 작은 단위 조직인 가족에서 孝가 행해지면, 나라에 충성하는 忠의 개념이 쉽게 받아들여진다. 다같이 사는 나라를 지키는 忠이 지배자에 충성하라는 忠으로 언제든지 전이가 가능하기에 실로 가장 효율적인 지배체제 개념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효와 충을 자기들 멋대로 이용해 먹는 정치인들과 국가 수장이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이 고생하고 있다. 유교 자체가 조상에 제사 지내 비를 내리게 해 달라는 것에 기원을 두고 있기에 '술사'에 가깝다. '술사'가 지배하는 나라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너무 유교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